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크 잭 플레처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쟁 ====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웨이크섬 전투]]가 벌어지자 14 기동부대를 이끌고 웨이크섬으로 향했으나 더이상 주력함을 손실할 순 없다는 상부의 결정으로 680km 거리까지 접근하고도 회항한다. 이후 17 기동부대를 이끌고, [[산호해 해전|포트모르즈비를 공격하러 투입된 일본의 5 항공전대를 막으러 산호해로 투입된다]]. 산호해에서의 전투에서 그의 기함 [[렉싱턴급 항공모함|렉싱턴]]은 격침되고 같이 출격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요크타운]]은 전치 3개월 이상의 판정을 받았지만 그는 일본군 항공모함 [[쇼호]]를 격침시키고 일본군의 [[포트모르즈비]] 상륙을 저지해 전략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다만, [[어니스트 킹]] 제독은 렉싱턴을 특별히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배를 날려먹은 플레쳐 제독은 미 해군 최고 권력자의 눈밖에 나고 만다... 그리고 그가 살려온 요크타운은 수많은 정비공들과 수병들을 갈아넣어서 3일만에 살려내고, 함대의 기함으로써 동생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데리고 [[미드웨이 해전]]의 대역전극의 주연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기함으로 탄 요크타운은 격침되고만다. 그래서 중순양함 아스토리아로 기함을 옮기게 되는데 여기서 그의 상대였던 일본군 제독들과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야마구치 다몬]] 등 일본 제독들은 이 때까지도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무에 실패하거나 패배한 경우 기함이 침몰하는 중이라면 퇴함을 거부하고 배와 함께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플레처 제독은 그런 거 없이 쿨하게 퇴함하여 다음 임무를 준비했다. 이는 플레처 제독만이 아니라 미군 제독들의 공통적인 인식이기도 했고. 이후 플레처는 중순양함에서 제대로 항공전을 지휘하기는 어려울 뿐더러 요크타운마저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자신이 지휘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다고 판단,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이끌고 있으며 여타 특별한 피해를 입지 않고 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플레처 제독이 더 상관이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권을 이양받지 못하면 스프루언스 제독 마음대로 함대 운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이후로도 계속 고마워했다고 한다. 정확히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권을 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한 것은 아니었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공격대는 적 항모를 치기 위해 출발했음. '''추가적인 지시가 있는가?'''"라고 전문을 보냈다. 여기서 추가적인 지시가 있느냐는 질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 플레처 제독은 "'''그런 것 없음. 이후는 귀관의 지시에 따르겠음'''" 이라며 쿨하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이 두 번의 승리로, 제독의 '목표를 달성하는 역량'에 대한 태평양 사령부 내부에서의 평가는 굉장히 높아졌다. 하지만 홀시 이상의 공세적인 지휘 성향으로 금쪽같은 대형 항공모함을 2척이나 날려먹은 탓에, 그의 [[체스터 니미츠|상사]][[어니스트 킹|들]]은 그가 보급과 전략에 관여하는 지위까지 승진하는 것까지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건 아니었다. 상대했던 적이 일본 최강의 항모전단이었고 미군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세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2척 밖에 날려먹지 않고 전략적 승리를 두 번이나 거뒀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업적이지만, 상사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플레쳐 제독 역시 그런 평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 결과, 그의 평가를 깎아먹는 사건이 2개월 후 [[과달카날 전투]]에서 벌어졌는데 과달카날에 미 해병대가 상륙한 이후 그는 항모부대에 재급유가 필요하다며 기함인 [[새러토가]]와 [[와스프급 항공모함|와스프]], [[엔터프라이즈(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를 과달카날에서 빼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두 번이나 기함으로 쓰던 항공모함을 잃은 그가 일본군의 공습으로 또다시 기함을 잃을 순 없다는 강박증에 걸려 퇴각한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그리고 8월 8일 [[사보섬 해전]]에서 미군 함대가 제대로 박살나면서 "핑계나 대며 도망쳤다!"라고 욕을 한바가지 먹는다. 해병대와 해군에게 쌍으로.[* 평가 문서에도 크게 써있듯이 과달카날 전역에서 해군의 켈리 터너 제독은 플레처 제독의 결정에 반발하며 자신보다 계급도 위인 플레처 제독에게 이 “개새끼야 넌 그러면 겁쟁이야!”라고 일갈 하기까지 한다.] 야간작전능력도 없는 항모전단이 현장에 있었으면 일본군 제8함대에게 무자비하게 유린당할 수도 있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플레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8월 24일~25일간 벌어진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함대에 맞서 엔터프라이즈와 [[새러토가]]를 이끌고 일본군 항공모함 [[류조(항공모함)|류조]]를 격침시키고 수상기모함 [[치토세]]를 대파시켰으며 일본군의 추가적인 상륙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 후 채 일주일도 지나기 전인 8월 31일. 그가 타고 있던 항공모함 새러토가가 I-26호의 뇌격으로 대파당할 때 그도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니미츠 제독은 그에게 8개월간 쉬지않고 지휘봉을 잡았으니 이 기회에 휴식을 가질 것을 권유했고 그도 권유를 받아들여 휴식을 취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휴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기동부대의 지휘관들은 항공계통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수상함 출신의 플레처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스프루언스도 수상함 출신인 것 같지만 넘어가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스프루언스 제독]]은 예외인 것이 해군참모총장이자 함대 총사령관인 [[어니스트 킹]] 제독이 다른 제독들과 달리 절대적이다 싶을 정도로 신임을 보내고 있었다.] 결국 그는 1942년 11월부터 비교적 한직인 북태평양 방면의 Northwest Sea Frontier의 사령관이 된다. 이 부대는 알래스카부터 시애틀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사실상의 좌천이긴 하였으나, 플레쳐 제독이 부임하는 시기는 과달카날에서의 전세가 미군측으로 기울던 때였고, 미군은 [[알류샨 열도 전역]]에서 공세를 펴길 원했기에, 플레쳐 제독 역시 공세의 일환 겸 사령부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로 부임한 것이긴 했다. 여기서 제독은 전투에 참여하진 않았고, 얄류산 열도 전역이 종료된 이후에는 해당 섬들도 제독의 관리 영역에 들어왔다. 가정이긴 하나, 얄류산 열도를 통해서 홋카이도로 진격하는 북방 루트가 채용되었다면 제독 역시 다시 전장에 나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함대를 이끌고 파라무시르를 포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루트는 결국 채택되지 않았고, 이 포격이 그가 지휘한 마지막 전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